뉴질랜드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뉴질랜드 남섬 넬슨(Nelson) 지역에 브라이트워트(Brightwater)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이 작은 시골마을에서 1871년에 한 아이가 태어난다. 당시 그 지역은 워낙 낙후된 곳이어서 과학 및 문명의 이기와는 동떨어진 곳이었다. 지역민들은 푸른 초원을 벗삼아 가축을 기르거나 감자 농사를 지으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이 부모는 스코틀랜드에서 온 이민자로 다른 지역민들과 마찬가지로 감자 농사를 했다. 노동 환경은 무척 열악했다. 운반 수단이라곤 큰 수레밖에 없었기에, 짐을 가득 싣고 이를 운반한다는 것은 큰 고역이었다. 특히 키높이 보다 훨씬 높게 감자를 실어서 먼거리를 운반해야 하는 경우도 빈번했는데, 돌이 섞인 흙길에서 운반하다가 넘어지는 일이 허다했다.
그럼에도 아이 부모는 감자 농사를 꾸준히 늘려갔고, 이에 덩달아 아이도 부모가 짓는 감자 농사에 매달려야 했다. 자외선이나 강한 뙤약볕 아래에서의 일은 몸과 마음을 지칠대로 지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소년은 환경에 굴하거나 탓하지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소년에겐 늘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늦은 나이인 10살에 비로소 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늘 책을 읽는 습관을 가졌으며, 특히 과학책을 읽는 데 시간을 많이 할애했다. 호기심으로 가득 찬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과학책에 수록된 여러 가지 실험들을 직접 해보는 횟수를 늘렸다. 어느 날 포탄을 제작한 어린 소년은 ‘이게 내가 만든 포탄이다’라고 하여 가족과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소년이 37세가 되던 1908년! 뉴질랜드는 물론 세계는 깜짝 놀란다. 그가 뉴질랜드 최초로 노벨화학상을 받은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다. 노벨상 선정 이유는 세계 최초로 원자 구조 입증, 원소의 붕괴 연구, 방사능 연구로 핵물리학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20세기 초 현대 물리학의 서곡을 장식한 그는 핵물리학의 아버지로 명성을 떨친다. 새로운 원자 모형을 만들어 현대 원자력 이용의 물꼬를 텄다. 흥미로운 점은 러더퍼드가 평소 “All science is either physics or stamp collecting (물리학을 제외한 과학은 우표 수집에 불과하다).”라고 치부할 만큼 물리학엔 자부심을 가졌지만 화학의 학문적 가치는 무시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노벨물리학이 아닌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그가 증명한 것은 모든 방사성 원소가 자연스럽게 다른 원소로 변한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선정위원회에서는 원소가 바뀌는 현상을 화학반응으로 잘못 알고 수여한 것이다. 화학상을 받기로 통보를 받은 러더퍼드는 마치 자신이 물리학자에서 화학자로 바뀐 듯한 데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뉴질랜드에서 가장 위대한 과학자이다. 뛰어난 업적을 인정한 뉴질랜드 정부는 최고액권인 100달러 지폐에 그의 얼굴을 새겼다. 러더퍼드는 1890년부터 1894년까지 뉴질랜드 남섬 크라이스트처치에 있는 캔터베리대학교(University of Canterbury)에서 물리학을 공부한다. 당시 캔터베리대학은 단지 150명의 학생들과 7명의 교수만이 있는 작은 학교였다. 그러나 치열하게 공부했다. 공부에만 매달린 것은 아니었다. 다양한 활동에도 참여했는데, 특히 럭비 선수, 과학토론클럽 등에서의 활동은 눈부셨다. 이렇듯 다방면에 활발한 활동을 한 러더퍼드이지만 처음부터 총명하지는 않았다. 그는 과학 실험에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보였으나, 수학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으며 실력 또한 상당히 부족했다. 어렵고 복잡한 수학 문제가 있으면 문제를 풀기 위해 몇 시간 공을 들인다. 그럼에도 풀지 못하면 중간에 포기했다. 하지만 과학 실험의 경우는 달랐다. 그렇다고 러더퍼드가 처음부터 과학 실험에 흥미를 붙인 것은 아니었다. 실험 과정에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부딪쳤다. 그럴 때마다 교과서적인 정통 실험방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여러 가지 실험 방법을 강구했으며, 이를 위해 시간에 구애받지 않았다. 때로는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그게 불가능하다”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다만 멋진 상상력을 갖고 있었으며 용감했고 끈기가 있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실천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아울러 동료 연구원이나 학생들에게 실험을 맡기는 경우도 극히 더물었다. 산란되는 알파 입자의 수를 세기 위해 엄청나게 긴 시간 동안 실험실에 앉아 있곤 했다. 이러한 지칠 줄 모르는 그의 노력은 물리적 세계의 이해를 바꿔 놓았다.
1895년! 그에게 인생반전의 기회가 찾아온다. 당시 물리학 연구로 세계적 명성이 자자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장학생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있었다. 그런데 장학생으로 1명만 선발한다는 점이 큰 부담이 되었다. 그럼에도 지원했다. 드디어 선정 결과가 발표되었다. 1등은 ‘제임스 매클로린’이 했고 러더퍼드는 2등을 했다. 어쩔 수 없이 유학을 포기해야 했다. 유학을 갈망하던 러더퍼드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예전과 다름없이 러더퍼드는 학업을 병행하며 감자 농장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학생 선정 결과가 발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정신없이 감자를 캐던 중 우편배달부가 편지 한 장을 건넸다. 그는 봉투를 열자 마자 “와~!”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뜻밖에 영국의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장학생으로 선정됐다는 통지서를 받았다. 얼마나 기뻤는지 통지서를 보자마자 캐던 감자를 던지며 “이 감자가 내 생애에서 캐는 마지막 감자다!”라고 외쳤다. 그렇다면 1등을 한 ‘제임스 매클로린’에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 1등을 한 ‘제임스 매클로린’이 장학금을 포기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의과대학을 가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영국 유학 장학금은 2등을 한 러더퍼드에게 주어지게 됐다. 유학은 훗날 그의 노벨상 수상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러더퍼드는 인재 양성에도 남다른 노력을 쏟았다. 당시 이공계 학생들에게 대체복무제도라는 것이 없었다. 그는 이 제도를 최초로 제안했으며 이를 제도화 하는데 공헌했다. 그의 제자 중 ‘헨리 모즐리’라는 학생이 있었다. 헨리 모즐리는 원자핵 속의 양성자 수와 원자번호의 관계를 과학적으로 입증해 냄으로써 노벨상 후보로 꼽혔다. 하지만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5년에 전사했다. 훌륭한 제자를 전쟁으로 잃은 러더퍼드는 큰 슬픔에 잠겼다.
이 사건을 계기로 러더퍼드는 영국 의회에 편지를 보냈다. 과학 인재들을 군대에 보내는 대신, 대학 또는 연구소 등에서 연구를 하게 하는 게 국가 이익에 더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영국 의회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공계 대체복무제도를 만들었다. 이 제도는 훗날 다른 여러 국가에도 확산되었다.
사진제공: Stuff
한글세계화운동본부 뉴질랜드 본부장, 한국어교육학 박사 박춘태